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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선 TV토론 어떻게 보셨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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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부문차장

그제 대통령 후보들 간 TV토론이 있었지요. 선거를 보름 앞두고 성사된 첫 토론이었습니다.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나요?

 대충 평이 이렇더군요. “여자 1호와 여자 3호가 싸우는 동안 남자 2호가 혼자 놀았다” “이정희의 거친 생각과 박근혜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문재인의 전쟁 같은 토론” 등.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강공’을 퍼붓는 동안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소외’돼 있었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사실 대통령 후보 간 TV토론, 그리 오래된 제도가 아닙니다. 1997년 처음 실시됐으니 이번이 네 번째군요. 당초 논의는 92년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노리(아이러니)’ 속에서 ‘아름다운 지하자원(관광자원)’을 위해 애쓰던 YS가 한사코 모든 후보가 참가하는 ‘평등’한 토론을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불발됐지요. 후보만 8명이었으니 YS의 방식대로였으면 이름만 토론이지 실제론 정견 발표쯤 됐을 겁니다.

 97년 사상 첫 TV토론 때엔 길거리가 한산했답니다. 명실상부한 빅3(이회창·DJ·이인제)가 겨뤘으니까요. 당시 끼어달라고 애쓴 이가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였습니다. 결국 5년 뒤 소원을 풀었지요. 참가 규정이 ‘전국 선거에서 5% 이상 득표한 정당 후보’로 완화되면서 말입니다. 권 후보는 토론에서 “한나라당은 부패원조당, 민주당은 부패신장개업당”이라고 공격하며 ‘한’도 풀었지요.

 이젠 후보 간 TV토론, 의당 하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잘한 TV토론’이 뭔지는 여전히 애매한 상태입니다. 대개는 말을 조리있게 하고 적극적이되 지나치게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일 터인데 예외도 많습니다. 97년의 DJ는 누가 보더라도 달변에 경험이 많은 후보였습니다. 스스로 ‘준비된 대통령’을 자처했을 정도니까요. 초반 TV토론 때엔 기세등등했습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반전됐지요. 지금도 대선일이 며칠 뒤였다면 당선자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2002년 후보 단일화 토론 때도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보다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과는 모두 아는 바입니다.

 유권자의 판단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TV토론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케이스로 늘 거론되는 게 ‘젊은’ 존 F 케네디와 ‘늙은’ 리처드 닉슨이 맞붙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지요. 닉슨은 따분하고 지루하고 골치아픈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42세 늙은이 같다”(『알파독』)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덟 살이나 더 나이를 먹은 뒤인 68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TV토론, 물론 거쳤습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다움을 보여주는 게 TV토론 승리의 요체”라고 설명합니다. 이 또한 아리송합니다. 유권자 대부분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답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 편향 때문입니다. 후보 요인도 있습니다. 과거보다 확실히 토론 기술이 좋아졌습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덕분입니다. TV토론을 앞두곤 하루 이틀 맹연습을 하곤 하지요. 후보가 한두 번 실수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곧 만회하곤 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올 토론이 그랬지요.

 이 때문에 TV토론의 변별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TV 앞에 앉을 겁니다. 한꺼번에 후보들의 자질을 볼 기회니까요. 또 이번 토론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특정인이 남측 대통령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출마한다는 이에게 27억원이란 국고를 주는 후한 국가란 걸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다섯 번째 토론부터는 실제 대통령이 될 법한 후보들끼리 끝장토론이었으면 합니다. 좀 더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말이죠. 그렇게 하려면 공급자 위주의 방식에서 탈피해야겠지요. TV토론을 변수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1등 주자와 어떻게든 토론에 끼어야 하는 군소 후보의 담합 말입니다. 법원도 달라져야 합니다. 유력 주자들만의 토론회를 무산시킨 건 2007년 서울 남부지법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