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오늘] 청일전쟁 방아쇠 당긴 일본, 10시간 만에 유린당한 경복궁

중앙일보

입력 2009.07.22 01:10

수정 2009.07.22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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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2일 밤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작전 목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삼는 것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이 사건은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경복궁 점령은 일본이 파병을 결정한 5월 31일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가 함락되던 그날. 일본 내각은 의회에 의해 탄핵당하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밖에서 전쟁을 일으켜 해소하려 했다. 1885년 갑신정변 사후 처리를 위해 청·일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에는 조선에 출병 시 ‘통고’해 준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일본은 이 조항을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해 청군 3000명이 아산만에 도착한 다음 날인 6월 2일 7000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7월 23일 0시30분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했다. 오전 4시20분 건춘문에서 시작된 교전은 10시간 이상 왕궁 이곳저곳에서 계속되었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군의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그날. 일본은 친일 괴뢰 내각을 구성하고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내세웠다. 친청 민씨척족은 정권에서 밀려났으며, 국왕은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다. 7월 25일 일본군은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26일 청의 수송선을 아산 앞바다에 묻었다. 일본이 동양의 패자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청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청병을 조선의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국의 독립 자주를 공고히 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8월 26일 조인된 ‘대일본 대조선 양국 맹약’ 1조는 이 전쟁이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8월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던 만리창으로 개선하는 일본군을 담은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속 일장기와 나란히 걸린 태극기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의 독립을 훼손한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그해 가을 항일의 기치를 다시 들었다. 이사벨라 비숍이 간파했듯이, “조선 어딘가에 애국심이 고동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들 농민 속에 있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