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맥경화' 공포에 유동성 블랙홀 된 은행…채안펀드 재가동

중앙일보

입력 2022.10.20 19:06

수정 2022.10.2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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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시장이 얼어붙으며 ‘돈맥경화’ 공포가 퍼지고 있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이 주된 원인이지만, 한국전력과 시중은행이 시중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고래가 된 영향도 크다. 최근에는 강원도가 보증을 선 레고랜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의 채무불이행까지 더해지며 단기금융시장에서는 ‘금리 발작’까지 벌어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채권안전펀드를 긴급 투입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시중은행이 은행채를 덜 발행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코스피가 전장보다 19.35p(0.86%) 내린 2,218.09 로 마감한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채권 금리는 일제히 뛰고 있다. 자금 경색 우려가 커지면서다. 20일 서울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날보다 0.019%포인트 오른 연 4.35%에 거래를 마쳤다. 회사채 3년물 (AA-) 금리는 연 5.588%로 전날보다 0.055%포인트 올랐다. 
 
단기자금 시장도 얼어붙고 있다. 3개월 만기 기업어음(CP) 91일물 금리는 20일 연 4.1%로 치솟았다. CP 금리는 전날 연 4.02%로 올해 들어 처음으로 4%대에 진입했다.


 
특히 회사채에 대한 투자 심리가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회사채(AA-,3년 물)와 국채 간 금리 차(스프레드)는 14일 1.14%포인트까지 벌어졌다. 2012~21년 중 장기 평균(0.43%포인트)을 크게 웃돌고 세계금융위기이던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회사채와 국채 간의 금리차가 벌어진다는 건 그만큼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조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회사채 등 자금시장에 찬 바람이 부는 건 기준금리 인상으로 신용도와 유동성이 낮은 회사채 투자 수요가 주요한 원인이다. 중앙은행의 긴축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게다가 국내 채권시장에 ‘생태교란종’까지 가세했다. 최고 신용등급(AAA)인 한국전력과 은행 등이 채권 발행을 늘린 탓에,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가 외면받는 '구축(驅逐) 효과'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 하반기 들어 은행들은 시중의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은행채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의 경우 지난1·2분기(-6160억원)에는 발행보다 상환이 많았는데, 지난 7월부터 지난 19일까지 17조180억원 순발행을 기록했다.  
 
회사채의 움직임은 반대다. 지난 1·2분기에는 8조3310억원의 순발행이 이뤄졌지만 올해 7월 이후에는 2조3101억원의 순상환이 발생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채와 한전채 등 우량 채권이 수급을 싹쓸이하다보니 (회사채 시장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채 발행이 늘어나는 건 늘어난 기업 대출 수요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도 영향을 미쳤다. LCR은 30일 간 순현금유출액 대비 예금과 국공채 등 고유동성자산의 비율이다. 은행들은 은행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으로 고유동성 자산의 비율을 늘리는 데 쓰고 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늘어나는 은행채 발행은 다른 채권 금리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은행채 금리(AAA·3년)는 지난 19일 연 5.151% 수준이다. 은행채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와 여전채, 캐피탈채 등은 이보다 금리가 높아야 그나마 시장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시중은행이 은행채를 쏟아내며 다른 금융회사의 자금 조달을 막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신용도가 떨어지는 일반 기업 뿐 아니라 신용도가 양호한 곳까지 금리가 오르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도 이날 보고서를 통해 회사채 스프레드 확대 배경으로 한전채와 은행채 등의 발행을 꼽았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1~9월 한전채와 은행채 등 AAA 등급의 초우량 신용 채권 순발행액은 48조원으로 전체 신용채권 순발행(49조8000억원)의 96%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신용등급 AAA인 한전채 금리는 지난 14일 연 5.45%로 회사채(AA-) 금리(연 5.35%)보다 오히려 높은 상황이다. 보고서는 “단기적으로는 한전채와 은행채 등의 발행 확대에 따른 시장의 수급부담 완화 방안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악순환도 시작됐다. 채권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이 은행 대출 창구에 몰리고 은행들이 은행채 발행을 늘리며 회사채 금리가 다시 오르게 된다. 지난 9월 말 기준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1155조4608억원으로 전달보다 9조3642억원 증가했다. 9월 동월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치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은행은 시중에 풀린 부동자금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이달 들어 연 4%를 넘어섰다. 우리은행(4.67%), 신한은행(4.6%), 하나은행(4.6%), KB국민은행(4.39%) 등이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한달 간 정기예금에만 32조4812억원의 자금이 새로 들어왔다. 5대 은행의 정기 예금 잔액은 지난 14일 기준 783조5003억원으로 지난달 말(760조5044억원)과 비교해 2주 만에 23조원가량 증가했다.
 
시중은행의 금리 경쟁에 불통이 튄 건 상대적으로 자금 조달 상황이 열악한 저축은행 등이다. 저축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6%가 넘어서고 있다. 예금자 입장에서는 이자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저축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한 기업 등은 더 많은 이자를 줘야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제2금융권의 예금이 시중은행으로 이동하는 머니무브가 본격화하면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은행이 향후 유동성 부족에 대비해 금리 경쟁을 통해 정기예금을 유치하고 있다”며 “저축은행 등 비은행 기관의 예금 조달 여건이 악화할 경우 금융 안정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0일 채권안정펀드 재가동 등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특별 지시사항을 발표했다.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금융시장 합동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채권시장 불안에 금융당국도 비상이 걸렸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이날 시장 안정을 위한 특별 지시사항을 통해 채안펀드 여유재원 1조6000억원을 공급하고, 각 금융사에서 캐피탈 콜(펀드 자금 요청) 실시도 준비하기로 했다.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지원 등도 적극적으로 시행해나갈 계획이다. 특히 은행들의 자금 조달 등도 살피고 있다. 
 
금융위는 이날 금융산업국장 주재로 5대 시중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재무 담당 임원과 만나 은행권 자금조달 현황 등을 점검했다. 또한 금융위는 LCR 규제 정상화를 6개월 간 유예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LCR 규제 정상화 유예로 은행들의 은행채 발행 압력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회사채 등 채권시장과 관련된 루머에 대한 집중 단속에 나선다. 최근 일부 금융사가 자금난에 처했다는 소문이 지라시로 돌며, 자금시장에는 불안감이 커진 상황이다. 특히 롯데캐피탈은 연 15% 금리를 제시해도 CP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소문 등이 돌기도 했다. 롯데캐피탈은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한 법적 조치 등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