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학교' 캐묻자 황장엽 암살조 실토…北 직파간첩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2019.07.25 15:43

수정 2019.07.2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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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직파 간첩 용의자 A(40)씨가 지난달 국가정보원에 검거돼 지난 23일 검찰에 송치됐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A씨는 북한의 대남 공작 업무 담당 기구인 정찰총국의 지시에 따라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스님 행세를 하며 간첩 업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인사가 전향해 이적(利敵) 행위를 한 포섭 간첩이 아닌 북한에서 직접 남파한 직파(直派) 간첩이 검거된 건 2010년 이후 9년 만이다.

 

◇암살·심리전·역(逆)공작·미인계…간첩 검거의 역사

남북 분단 이래 간첩 활동은 주요 첩보 수단이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정보·통신 기술이 고도화되고, 해킹이 주요 교란·첩보 활동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간첩이 줄어들곤 있지만, 과거엔 그 숫자가 상당했다. 간첩(間諜)이라는 말 자체가 이간질(間)과 정보수집(諜)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휴전 상태에서 적진 내부 와해를 도모하고 정보를 캐내는 데엔 간첩만큼 주요한 수단이 없었다. 구체적으론 정보 수집 및 반정부 지하조직 구축, 주요 시설 파괴, 요인 살해ㆍ납치 등이 주 업무였다.

스님 행세 직파 간첩 검거로 본 암살·심리전·역(逆)공작·미인계 등 남파 간첩의 역사

이번 사건 직전 마지막 직파 간첩 검거사례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있었다. 황장엽(1997년 월남)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암살 미수 사건이다. 당시 북한 정찰총국 소속의 암살조 2명(동명관·김명호)은 일반 탈북자들과 함께 라오스와 태국·방콕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사전에 “북한에서 황장엽의 친척으로 위장하여 황 전 비서를 암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은 그해 4월 탈북자들을 상대로 집중 심문을 했다.
 

2010년 4월 21일자 중앙일보 1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암살하기 위해 남파된 김명호와 동명관이 전날 간첩 혐의로 구속된 내용이다. [중앙일보 캡처]

각각 김명삼(김명호)·황명혁(동명관)이란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암살조가 국정원에 덜미를 잡힌 건 허를 찌른 국정원의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김씨는 자신이 “함경남도 함흥시 흰실동에서 태어나 흰실인민학교를 졸업했다”고 주장했는데, 국정원은 이에 과거 흰실동 출신 탈북자로부터 수집해 놓은 데이터베이스(DB)를 토대로 심문에 들어갔다.  

 
수사관은 “초등학교의 구조가 어떤가” “교장 선생님 인상착의는 어떤가” “흰실초등학교 뒷산엔 어떤 나무가 있었나” 등을 물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김씨는 결국 사실을 털어놔야 했다. 황명혁으로 위장한 동씨 역시 본인 고향이라고 주장한 함흥시 정성동의 옛 지명을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못하면서 간첩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이 북한 각지에 대한 정보를 DB로 구축해 놓은 게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암살조 2명은 결국 같은 해 7월 법원에서 징역 10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주요 간첩 검거 사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8월엔 정경학 간첩 사건이 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이어 북한과의 화해 모드를 이어가던 시기라, 직파 간첩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김일성종합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 정경학은 1996~1998년 세 차례에 걸쳐 남한에 잠입해 용산 미군 부대 등 주요 시설을 촬영해 북한에 전달하다 국정원에 포착돼 검거됐다. 당시 정경학은 “전시 정밀 타격을 위한 좌표 확인을 위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망원렌즈로 울진원자력발전소 사진을 찍어 북한으로 보냈다”고 자백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006년 7월 27일 국정원이 정경학을 체포하면서 압수한 위조 여권. 정경학은 필리핀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했다. [연합뉴스]

‘역(逆) 공작원’을 이용해 직파 간첩을 잡은 사례도 있다. 1980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던 고정간첩 이선실(북한 권력 서열 19위)을 1990년 무사히 북한으로 데려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무장간첩 김동식은 1995년에도 비슷한 일을 수행하러 남파됐다 붙잡혔다. 그가 데려올 예정이었던 간첩 ‘봉화 1호’가 이미 15년 전부터 우리 국정원에 포섭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를 몰랐던 김동식은 봉화 1호를 만나러 가다 국정원에 검거됐다.
 

1996년 1월 26일 김동식이 서울중앙지법에 출두하는 모습. 김동식은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에서 간첩 혐의로 생포됐다. [중앙포토]

‘무하마드 깐수(한국명 정수일)’ 사건도 유명하다. 중국 옌볜 출신인 정수일은 북한 노동당에서 간첩 교육을 받은 뒤 레바논인으로 국적을 세탁해 1982년 한국에 잠입,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단국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15년간이나 활동했지만, 아내조차 간첩 사실을 모를 정도로 위장에 철저했다. 안기부(국정원 전신)는 도청 등으로 그를 추적하다 1996년 검거했다. 그는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7월 22일 무하마드 깐수 단국대 교수가 필리핀인으로 위장한 남파 간첩 정수일임이 밝혀져 간첩 혐의로 구속되는 장면. [중앙포토]

다만 정수일의 경우 간첩 활동보단 학술 활동에 더 전념했고, 실제 그가 북한에 보낸 자료들도 대다수 본인의 전공(아랍 역사) 관련 학술 내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때문에 정수일은 복역 5년만인 2000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날 수 있었고, 이후 전향 의사를 밝힌 뒤 현재 국내에서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밖에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당시 시한폭탄을 두고 내리는 역할을 했던 간첩 김현희 사건이 있다.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당시 안기부에 체포된 김현희. [중앙포토]

◇남파간첩 검거 실적은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7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검거된 간첩 수는 ▶1950년대 1674명 ▶60년대 1686명 ▶70년대 681명 ▶80년대 340명 ▶90년대 114명이었다. 나날이 줄어드는 추세인데, 특히 직파 간첩은 ▶1950년대 1522명(검거 간첩의 90.9%) ▶60년대 1280명(75.9%) ▶70년대 287명(42.1%) ▶80년대 95명(27.9%) ▶90년대 32명(28.0%)으로 급감했다.   

분단 후~2000년까지 간첩 검거 사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후 2013년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검거된 간첩은 노무현 정부에서 14명, 이명박 정부에서 31명이었다. 또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에서 검거된 간첩 수는 7명이었고, 문재인 정부에선 당시 기준 검거 수 1명이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