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순종의 일본 방문길] 下

중앙일보

입력 2003.03.18 18:47

수정 2003.03.20 13:52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부산 영주항에서 일본 군함 비전(肥前)을 타고 1917년 6월 9일 오전 8시 30분 출발한 순종 일행은 그날 오후 8시쯤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다. 일본 궁내성의 서기관급 반접관(伴接官)이 출영했고 시모노세키항 경비군함부가 예포를 발사했다.

그곳 역 인근 해안, 산양(山陽)호텔에서 하룻밤을 투숙할 예정이었으나 춘범루(春帆樓)로 바뀌었다. 산양호텔은 1902년 역전 광장 왼쪽에 세워진 호텔로 주로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의 고관 대작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복동생 영친왕과 10년만에 재회

춘범루는 '시모노세키 제일의 대여관이요. 조망이 매우 좋아 누상에 서면 관문 해협의 풍광이 일순에 잡히는 명소'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이복동생인 황태자 이은(李垠.1897~1970.영친왕)이 1907년 12월 일본으로 끌려갈 때 머무른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시모노세키는 조선 덕분에 커진 도시다. 1889년의 인구가 3만7천39명이었는데 순종이 도착할 즈음 7만명에 이르렀다. 두배로 성장한 것이다.

순종은 10일 8시30분 8704호 궁정열차로 시모노세키역을 출발, 세토나이카이의 도시 무자(舞子)에 도착해 하루를 묵었다. 원래는 만구루(萬龜樓) 여관에 들기로 했으나 아리수가와노미야(有栖川宮) 별궁에 들었다.


11일 무자를 출발한 순종 일행은 나고야에 도착한다. 나고야 호텔에서 1박하고 12일 나고야를 출발한 그들이 도쿄역에 내린 것은 오후 5시. 역 구내에는 군악대의 주악이 울려퍼졌다. 열차에서 내린 순종은 보랑(步廊)을 직접 걸었다. 우리 유학생 3백여명의 만세 소리가 역 구내를 진동시켰다.

일본측의 봉영 접반역은 시부차장 이토 히로구니(伊藤博邦) 공작이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이었다.

순종은 궁내성의 계획에 따라 마차로 움직여 가세키(霞關) 이궁으로 갔다. 처음에는 시바리큐(芝離宮)에 머물 예정이었으나 장소가 바뀐 것이다. 수행원들은 아자부(麻布)의 도리이사카(鳥居坂)에 있는 어용저(御用邸)로 들어갔다.

순종과 일행은 13일 오전 11시30분 황실 의장마차로 이중교 정문을 건너 궁중에 들어갔다. 천종간(千種間)에서 일본측 사람들을 만났다. 이어 봉황간(鳳凰間)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에서 천황과 대안(對顔)한 후 진례(陳禮)를 하고 토산품을 주고받았다. 이어 잠시 동간(桐間)에서 휴식을 취하고 풍명전(豊明殿)에서 의식을 행했다.

다이쇼 천황과는 1907년(메이지 40년) 만난 이후 10년 만의 재회였다. 그는 1912년부터 천황이 되어 있었다. 풍명전은 김대중 대통령이 몇 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천황과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16일에는 근위 제2연대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아카사카 이궁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이은 황태자의 집도 방문했다. 하루 휴식하고 18일은 일본 황족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어 19일 다시 황궁을 방문, 고별의 의를 나눴다.

도쿄 일정을 마친 순종은 20일 귀경 길에 올랐다. 상주 삼도(三島)에 도착, 왕세자 전하의 별저에서 하루를 묵었다. 상주는 현재의 시즈오카(靜岡)현으로 가나가와(神奈川)현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22일 오후 4시10분 교토역에 내렸다. 교토 원산(圓山)공원의 장락관(長樂館)에 묵었다. 교토 체재 중 메이지 천황의 도산(桃山)릉을 참배했으며 24일 교토를 출발했다.

조선인이 많이 사는 오사카를 들르지 않고 통과했는데 그것은 시끄러워 질 것을 우려한 일본의 계책이었다. 대신 히로시마 인근 관광지 미야지마(宮島)에 도착 하루를 묵었다. 일본 3경 중 제일이라는 미야지마였다. 거기서 순종 일행은 이쓰쿠시마(嚴島)신사를 구경했다. .

이번 취재에서 나는 이쓰쿠시마 신사를 찾아가 보았다. 일본에는 소위 내왕 기념으로 유명지마다 일본 천황 혹은 왕세자, 황족들이 들렀다 가면서 비석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어 흔적을 남긴다.

지금도 일본 여러 곳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혹시 순종이 머문 기념석이라도 있는가 해서 경내 이곳 저곳을 살폈다. 그러나 그것은 헛일이었다. 일본인 중 그곳에 순종이 하루를 묵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순종은 26일 궁도를 출발, 시모노세키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하루를 묵었다.

일본 도착할 때와 모든 일이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27일 비전함에 탑승, 일본땅을 떠났다. 28일 부산에 도착, 바로 한성으로 향했다.

오후 5시40분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 그 길로 덕수궁으로 가서 고종에게 인사를 했다. 행차는 처음 계획은 2주간이었으나 3주간으로 늘어났다. 신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리 여정을 종(終)하시고', 종로 와룡동(臥龍洞)의 창덕궁으로 드셨다"라고.

이렇게 순종의 일본 방문 길 취재는 끝났다. 하지만 나는 내내 우리와 일본 어느 나라 학자도 그 사실을 기록에 남기거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지 않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왜 그럴까. 순종은 우리 왕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한 왕 아니던가.

물론 그의 일본 방문이 비록 자의는 아니더라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의 일이긴 하다. 또한 그간 순종의 일본 행차에 관한 사진은 한국과 일본 어디서도 공개된 적이 없다. 매일신보에 스냅 같은 사진만 실려 있는 정도다.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에서 차단시킨 게 분명해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은 매일신보를 통해 소개된 순종의 일본 방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행여 같은 시기 연재 중이던 소설가 이광수의 '무정'에 취해 아무 생각을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물음에도 역사는 말이 없다.

김정동 교수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 문화재 전문위원




3월 19일자 20면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일본 방문길'(하) 기사 중 1907년은 다이쇼 6년이 아니라 메이지 40년이기에 바로잡습니다. 다이쇼 6년은 순종이 일본을 방문한 1917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