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차 긁고 도망간 사람 처벌 못해? '뭐이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서울 관악구에 사는 박모(43)씨는 아침 출근 전에 승용차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긁힌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해 12월 집 앞 골목에 주차해놓은 차에 다른 차가 접촉사고를 낸 뒤 달아난 후부터다. 이 ‘주차 뺑소니’로 차 뒤쪽 범퍼가 심하게 긁힌 것을 확인한 박씨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골목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화면을 입수해 분석했다. 그러나 화질이 안 좋아 차량번호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박씨가 직접 목격자를 찾아다닌 끝에 가해 차량 소유주를 경찰에 넘겼다. 그러나 검찰로 넘어간 사건은 “처벌할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리됐다. 박씨는 “다섯 차례나 경찰서를 오가며 괜히 진만 뺐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주차 뺑소니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관악경찰서의 경우 지난 11일 접수된 10건의 교통사고 중 4건이 주차 뺑소니 사고였다. 경찰 관계자는 “하루 신고되는 교통사고 중 주차 뺑소니가 30%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처벌이 어렵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우선 CCTV로 가해 차량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시내에 설치된 CCTV는 대개 방범용으로 20만 화소 내외다. 이 때문에 흐린 날이나 밤에는 차량번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경찰 관계자는 “맑은 날에도 사각지대가 많고 화질이 나빠 번호판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또 현행법으로 주차 뺑소니를 처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현재 대법원 판례는 차량만 파손됐을 경우 인명피해가 난 때와 달리 뺑소니로 보지 않는다. 접촉 사고 후 다른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데도 도주한 때에 한해서만 도로교통법상 ‘사고 미조치’로 보고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사고로 인해 다른 차량들의 통행이 방해될 때는 처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물적 피해 역시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는데 주차 뺑소니 운전자들은 대부분 ‘사고가 난 줄 몰랐다’고 한다”며 “차량만 부서진 상황에서 형사처벌까지 하는 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고 설명했다.

 경찰청은 주차 뺑소니 민원이 잇따르자 올해 1월 ‘주차 뺑소니 처벌을 강화하라’는 지침을 일선 경찰서에 내려보냈다. 그러나 뚜렷한 처벌조항이 없어 대부분의 사건은 검찰 단계에서 불기소로 처리된다.

 보험업계에서는 “가해차량 보험회사로부터 보상을 받거나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는 길밖에는 없다”고 제시하고 있다. 정현해 변호사는 “사고 후 도주한 건 엄연한 뺑소니에 해당한다”며 “관련 사고가 증가하는 만큼 인명피해가 없더라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관련 법을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원엽·오세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