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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안상호의 고종독살설은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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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안상호(安商浩, 1872~1927)는 일본에서 고학(苦學)을 하여 조선인 최초로 일본 의사(洋醫) 자격증을 취득했다. 1919년 당시 이왕직 전의(典醫)로 재직 중이던 그는 고종 독살설에 휘말렸다. 그런데 고종이 죽은 1919년 1월은 일제가 전 세계에 한일병합을 조선과 일본의 ‘행복한 결합’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를 정략결혼시키려던 때였다. 그러니 그들의 계획상 고종은 오히려 죽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안상호가 독살을 했을 가능성뿐 아니라 고종이 독살됐다는 설 자체도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한다(송우혜,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 푸른역사, 2010).

 그럼에도 안상호는 왜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대중에게 그의 특수한 가정사를 노출했던 전력이 연관되어 있다. 왕세자의 결혼 예정일 직전에 『매일신보』는 “이 경사로운 가례(嘉禮)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때에 조선에서 남보다 일찍 내지인과 결혼을 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온 사람의 가정을 방문하여 보는 것”을 취지로 한 『왕세자 전하 가례 전에 일선동체의 가정 방문』(『매일신보』, 1918.12.8~12)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이 중에 안상호의 가정도 끼어 있었다.

 기자가 방문한 안상호의 집은 안상호가 기자에게 조선어로 말하는 것 외에는 완전한 일본 가정이었다. 안상호는 “나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인 아내와 함께 오 남매를 일본식으로 키우는 행복을 자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를 민족을 배반한 골수 친일분자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선인들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충격적 소식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독살과 같은 음모가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그때 쉽게 눈에 띈 것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 친일파로 낙인 찍힌 전의 안상호였다.

 오늘날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 터지면 이를 믿을 수 없는 자들이 제기하는 것이 ‘○○설’ 등과 같은 음모론이다. 물론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옳으며, 그 결과가 많은 경우 사회를 좀 더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가끔은 진정한 ‘진실’을 찾고 싶다기보다 쉽게 눈에 띄는 ‘분풀이 대상’을 찾아내어 그 일에 대한 자신들의 충격과 분노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듯도 하다. 그 과정에서 엉뚱한 희생양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진짜 밝혀져야 할 진실은 더 깊숙이 감춰질 위험도 있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진실’에 근거한 ‘정당한’ 분노 대상을 향하고 있는가?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