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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스타일]IMF 한파…문화 생태계도 파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최근 실직한 허영구 (43) 씨는 마음 둘 곳이 없다.

잘 나가던 모 항공사 부장 전력을 팔아 아는 사람 만나는 것도 한두번이다.

기원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당구장도 가본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비디오 테이프를 한꺼번에 10여개씩 빌려 하루종일 돌려본다.

그것도 지친다.

만화방도 기웃거려 보고 20년 전쯤 끊었던 무협소설도 빌려본다.

사는 걱정, 살아갈 궁리에 지쳐 골치아픈 건 질색이니까. 그런 허씨에게 “문화 소비자로서 올해는 어떻게 지낼 계획입니까?” 하고 물었다.

허씨 왈. “먹고 살기 빠듯한데 웬 문화생활?

한가한 얘길랑 몇년 뒤에나 하시오. ” 불황, 아니 공황시대의 문화생산자들은 이런 소비자를 상대로 자신들의 상품을 팔아야 한다.

만화.무협소설 등 값싸고 현실도피.망각형 하위 문화상품의 생산/소비는 늘고 영화.연극.방송 등 대중문화는 '동면' 과 '거품빼기' 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문화 판이 한차례 거센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무협전문 출판사 뫼의 대표 최재봉 (37) 씨는 요즘 더 바빠졌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무협작가 지망생의 전화나 방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 난에 시달리던 얼마전과는 격세지감을 느껴야 했다.

“무협은 동양적 SF입니다.

환상은 시름과 걱정을 잊는 묘약입니다.

무협은 그런 환상을 독자에게 값싸고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수단이지요.” 최근 만화방이 붐비고 비디오 대여점이 인기인 이유도 마찬가지란 게 최씨의 부언이다.

반면 출판계는 돈 드는 번역서 출간을 줄이고 있고 미술 전시회도 줄줄이 취소됐다.

문 닫는 공연장이 느는가 하면 제작비를 못 구해 휴면에 들어간 영화사도 꽤 된다.

뚜레박소극장이 얼마전 문을 닫았고 성좌소극장.하늘땅소극장도 대관이 안돼 극장을 놀리고 있다.

불황 땐 안 만들고 안 팔거나 값싸고 질 높은 상품만이 살길이다.

생산품의 주종은 멜로와 복고다.

연극계에는 요즘 '잠수' 가 유행이다.

이름 알만한 중견 연출가 열에 아홉은 그냥 쉬고 있다.

일 벌리자면 돈이 든다.

제작비 구하기도 어렵지만 흥행에 실패하면 뒷감당이 불가능하다.

연초에 막을 올린 '결혼한 여자와 결혼안한 여자' 의 제작.연출자 박계배 (44) 씨는 열에 하나의 예. 박씨는 공연 전 혹시나 하고 오랜 스폰서인 모 콜라회사에 들렀다.

후원금 대신 콜라로 가져가란 얘길 듣고는 역시나 하고 돌아서야 했다.

“배우들과 같이 세트를 직접 만들었다.

업자에게 주문하면 6백만원 넘게 들 걸 1백20만원으로 해결했다.

출연료도 잘되면 주기로 했다.

그야말로 초경비절감형이다.”

'결혼…' 을 선정한 이유도 불황 탓이다.

신작은 부담스럽다.

어디서 추가 경비가 들지 모르고 흥행도 불안하다.

잘 나갔던 작품을 재탕하는 게 안전하다.

방송가도 사정은 마찬가지. 좋게 말해 '복고' 고 나쁘게 말해 '재탕' 이 판을 친지 이미 오래다.

문화방송은 몇해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들을 줄줄이 틀어 대고 서울방송도 곧 '모래시계' 를 재방송한다.

드라마의 해외 로케는 모조리 취소됐다.

덕택에 이달 말 방영 예정인 MBC의 신작 '사랑 (가제)' 의 주인공 장동건은 세계적인 카레이서에서 갑자기 국내 제일의 카레이서로 '강등' 당했다.

물론 작가 주찬옥씨는 부랴부랴 시나리오를 고쳐 써야 했고. 영화 제작편수도 예년의 절반을 조금 넘는 40편 미만에 그칠 것이란 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지난 연말부터 대기업들마저 한계사업이라며 정리단계에 들어섰다는 흉흉한 소문도 돈다.

몇년전부터 추진해온 드림서치의 '제이슨 리' 며 제이콤의 '쿠데타' 등 초대형 합작영화 제작은 투자자를 못 구해 물건너간 지 오래다.

영화감독 이광훈씨는 “올해는 국수주의 작품이 주목받을 것” 이라고 전망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이긴 한국의 조아저씨 햄버거 스토리' 따위가 그것이다.

오랜 단일민족인 우리의 정서에는 그게 맞는다는 얘기다.

국난이나 외침 (外侵) 때는 놀라운 단결력과 저항정신을 보여왔던 전력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담느냐는 작은 문제다.

어떻게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

경제도, 문화도 우리는 질보다 양이었다.

이 점에선 불황이 오히려 문화의 거품을 빼고 건강한 생산/소비 관계를 정착시키는 기회일 수도 있다.

아니 꼭 그렇게 돼야 한다.”

이감독은 지금까지의 비싸고 질 낮은 문화의 생산.소비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곧바로 문화 암흑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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