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욕 필 평양 공연] 아리랑 피날레 … 평양 청중들 5분간 기립박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26일 평양의 동평양대극장에서 뉴욕 필하모닉 공연을 관람한 북한의 고위층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다. [평양 AFP=연합뉴스]

뉴욕 필 평양 공연의 사회를 맡은 고은별 평양 외국어대 영어연구사. [연합뉴스]

26일 뉴욕 필의 역사적인 첫 평양 연주가 끝난 동평양대극장의 로비. 빠져 나오는 청중에게 소감을 묻자 대부분 “황홀한 연주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관록 있는 예술단체라고 하더니 정말 자신들의 음악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서양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처음 들으면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됐다는 표정이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아리랑’은 우리의 음악이다 보니 정신을 잘 표현하기가 아무래도 힘든 것 같다”는 반응도 나왔다. 무조건적인 수용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공연에 대한 북한의 일부 비판적 시각은 공연 전 열린 뉴욕 필의 기자회견에서도 확인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보이스 오브 코리아’(북한의 해외방송) 기자는 “조선의 음악은 자주와 진보적인 인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신들은 어떤 심정으로 평양에 왔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장은 뜨거웠다. 새로 손을 본 동평양대극장의 음향은 이날의 감격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단원들에게 정확한 사인을 주며 특유의 곱씹는 스타일을 보여줬다. 모든 소절에 의미를 넣어 꼼꼼히 연주했고 8세에 ‘지휘 신동’으로 데뷔한 것을 증명하듯 바그너와 드보르자크의 곡을 모두 외워 지휘했다. 특히 전형적인 미국 작곡가 거슈윈의 곡을 연주하면서 뉴요커의 재즈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연주자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며 미국인 특유의 유머와 여유를 보였다.

이날 마젤은 “좋은 시간 되세요” “즐겁게 감상하세요” 등 연습해온 한국어로 ‘팬 서비스’에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는 ‘파리의 미국인’을 연주하기 직전 “앞으로 ‘평양의 미국인’이 작곡될지도 모른다”며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앙코르곡 ‘아리랑’이 끝나자 1500여 청중은 모두 일어섰고 5분 넘게 뉴욕 필 단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퇴장하던 연주자들도 무대 뒤에 서서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미국·한국에서 온 관객에 비해 다소 경직된 자세로 공연을 지켜보던 북한 객석에서도 힘차게 손 인사가 시작됐다. 교향악단의 베이스 연주자인 존 딕은 “손을 흔들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단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날 공연은 미국의 문화를 ‘제국주의 문화’로 폄하해온 북한이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마젤은 연주회가 끝난 뒤 “우리가 사라지고 난 후까지 청중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는 것이 좋은 신호다. 이제 작은 문을 열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평양에 온 미국인’들은 북한의 변화에 대해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19세에 뉴욕 필에 처음 들어와 올해로 60년째 클라리넷 주자로 참여하고 있는 스탠리 드러커는 1959년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처음 소련에 갔던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 소련의 공연장에서 팸플릿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들 한 달 월급은 얼마냐’고 물어왔다”며 “25일 저녁 만찬 자리에서도 북한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해왔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이날 오전 리허설을 마치고 북한의 음악 학도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도 가졌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관악 대표 등은 김원균 명칭 평양 음악대학 학생들을 만나 바이올린 줄, 악보, 관악기의 리드 등 서양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데 필수적인 물품을 전달했다. 이 선물에는 모차르트·하이든·베토벤의 모든 곡이 들어있는 CD전집도 포함됐다. 러시아·동유럽 음악에 친숙한 북한에 서양의 다른 고전음악이 전달된 셈이다.

1842년 설립된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은 정확히 1만4589번째다. 오케스트라의 자린 메타 대표는 “세계 오케스트라들의 기록 중 놀라운 숫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역대 공연에 공연 횟수를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뉴욕 필은 서울 공연을 위해 27일 오후 1시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한다.

북한 출신의 부모를 둔 바이올린 단원 미셸 김의 말은 미국인들이 느낄 평양에 대한 인식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11세 때까지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평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 달랐다. 호텔 창밖을 내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참혹(painful)했다. 다음 세대에 다시 왔을 때는 달라지길 바란다.”

이번 공연에는 AP·로이터·AFP 등 통신사,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월 스트리트 저널 등 신문사, CNN·ABC·BBC·NHK 등 방송사를 포함해 전 세계 취재진 130여 명이 몰렸다.

평양=김호정 기자

◇뉴욕 필하모닉=1842년 설립된 미국 최고(最古)의 오케스트라. 뉴욕 링컨센터 내 에이버리 피셔홀에 상주한다. 뉴욕 유일의 오케스트라이고 뉴요커 사이에서는 ‘더 필하모닉’이라 불릴 정도로 뉴욕의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한다. 구스타프 말러에 이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존 바비롤리·브루노 발터·레너드 번스타인 등 거장들이 지휘봉을 잡았다. 2002년부터는 로린 마젤이 음악감독 겸 지휘를 맡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