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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 날뛴’ K실험미술, 구겐하임서 선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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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호 18면

전위예술 전시 2제

 정강자 ‘키스미’(1967/2001).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정강자 ‘키스미’(1967/2001).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68년 연말, 한 국내 주간지는 발광상(發狂賞) 수상자들을 선정했다.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미쳐 날뛰는 짓’을 한 사람들을 조롱하는 목적이었다. 2위는 한국에서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어르신들의 분노를 산 가수 윤복희였다. 대망의 1위는 그해 5월 쎄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예술가 강국진·정찬승과 함께 ‘투명풍선과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인 예술가 정강자였다.

퍼포먼스 내용은 이랬다. 존 케이지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속옷 하의만 남기고 나신을 드러낸 정강자의 몸에 사람들이 투명풍선을 붙였다가 터뜨리는 것이었다. ‘발광’과는 거리가 멀게, 이 퍼포먼스는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제1회 국전에서 누드화가 풍기문란으로 철거되었던 일을 풍자하는 동시에, 쎄시봉을 장소로 택함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를 결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미술사학자 조수진). 정강자는 누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입체작품 ‘키스미’에서 위협적으로 치아를 드러낸 여성 입술을 통해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표현한 적이 있는 그였다. 퍼포먼스의 결과는 경찰 출동과 요란한 세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원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인 정강자에게 비난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국전 심사 비리가 터지자 강국진·정강자·정찬승은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밑에 모였다. 그곳에 세 개의 구덩이를 판 뒤 비닐 천을 몸에 감고 구덩이에 들어가 목만 내놓은 채 관객들에게 물세례를 받았다. 살해되어 무덤에 묻혔음을 의미하는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이었다. 무덤에서 나온 그들은 비닐 천 위에 흰 페인트로 그들을 타살한 기성세대를 고발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읽고 태운 후 매장했다.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  [황양자, 국립현대미술관]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 [황양자, 국립현대미술관]

지금 이들 퍼포먼스의 기록과 ‘키스미’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에서 7월 16일까지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서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국현과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이하 구겐하임)이 2018년부터 공동연구·기획한 것으로, 서울 전시가 끝난 뒤에 9월 1일 구겐하임에서, 내년 2월 11일부터는 LA 해머미술관에서 순차적으로 열릴 예정이다.

전시를 보면, 산업화와 ‘건전한’ 사회 기풍 형성에 집중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이렇게 ‘불온한’ 예술 실험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더욱이 서구 예술가들이 기존 미술의 주류였던 회화와 조각에 반기를 들고 해프닝 등의 퍼포먼스와 필름·비디오, 일상 사물의 설치 등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불과 1950년대 말부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한국 현대미술과 서구와의 시차가 이때부터 상당히 좁혀져 있었던 것도 놀랍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실험미술 1960-70’ 전시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실험미술 1960-70’ 전시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사회 비판이 직설적이기보다 에두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메시지가 강경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으나 직설에서 오는 프로파간다성을 벗어나 더 여러 상황에 열려 있다는 장점도 있다. 최근에 세계적인 갤러리 리만머핀과 전속계약을 하며 뒤늦게 국제적으로 빛을 보고 있는 작가 성능경의 퍼포먼스가 한 예다.

그는 1974년 그가 속한 전위미술단체인 ‘ST(Space&Time)’의 국현 전시에 두 달여간 매일 나가서 그날의 신문 기사를 오려내어 기사와 나머지 부분을 따로 모아놓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 시절에도, 또 오늘날에도,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작업이다. 당시 그는 “혹시라도 중앙정보부에서 누군가 조사 나왔을까 조마조마했다”고 회고한다. 지금 보면 황당한 걱정이지만 당시에는 예술 작품이 조금이라도 사회성을 띄면 반정부 행위로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기우가 아니었다. ST의 활동은 전시 제5섹션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성능경의 퍼포먼스는 전시 기간 중인 6월 21일에 재현될 예정이다. 또한 60~70년대 실험미술의 간판 작가이며 제2섹션의 주인공인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가 6월 14일에 예정되어 있다. 행위예술을 회화로 연결한 ‘바디스케이프’ 연작으로 국내외 미술시장을 휩쓸고 있는 작가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는 6월 28일이다.

전시에서 조명하는 1960~70년대 패기 넘치는 청년작가들 중에는 앞서 언급한 정강자·강국진·정찬승처럼 타계한 작가들도 있으나, 김구림·성능경·이건용처럼 최근에 해외에서도 인정받으며 활발히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도 많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가 제4섹션의 주인공 이승택이다. “통상 전위미술이 전통의 부정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전통예술의 재발견을 통해 ‘거꾸로’ 그 돌파구를 마련하였다”고 국현과 구겐하임은 그에 대해 설명한다. 이 섹션에는 그가 당시 사라져 가던 옹기를 가지고 만든 입체작품 ‘무제(새싹)’(1963/2018)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도 서승원·심문섭·이강소·하종현처럼 지금은 국내외에서 회화로 명성을 떨치는 작가들이 청년 시절에 제작한 실험미술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들은 제2섹션에서 다루는 전위예술단체 ‘AG(한국아방가르드 협회)’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앞서의 김구림·이승택도 활동했던 AG는 1969년 설립되어 1975년 공식적으로 해체되기까지 총 3번의 주요 전시와 1974년 서울 비엔날레를 진행했다.

 스페이스21 개관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 전경. [사진 스페이스21]

스페이스21 개관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 전경. [사진 스페이스21]

마침 AG를 결성한 예술가들과 평론가를 조명하는 또 하나의 전시가 서울 강남에서 열리고 있다. 신사동에 5월 10일 새로 문을 연 ‘스페이스21’의 개관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이다. 공간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 미술사의 주요 평론가로 손꼽히는 이일(1932-1997)을 기리며 그의 장녀 이유진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이 대표와 미술사학자 정연심 홍익대 교수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작가 9인(김구림·박석원·서승원·심문섭·이강소·이승조·이승택·최명영·하종현)의 AG 활동 당시 작품의 재현 혹은 아카이브와 최근의 작품을 함께 보여주어 그 진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1970년대에 네 번 출간된 AG 출판물과 도록, AG 전시 포스터 등은 지금 봐도 그 디자인의 세련미가 놀랍다. 또한 이들과 함께 AG를 이끈 평론가 이일의 친필 원고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AG가 다른 전위예술 단체와 다른 점은 잡지를 만들어서 평론가와 작가들이 함께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성을 논하고 해외 미술과의 국제적 동시성을 찾았다는 것이다”라고 정 교수는 설명한다. “이들이 기획한 세 번의 주요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 전시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정 교수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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