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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수학자 사진가, 이상한 좌표에 매료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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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호 31면

‘Integration of time·시간의 축적_노동당사’, 2006년. © 서동엽

‘Integration of time·시간의 축적_노동당사’, 2006년. © 서동엽

‘폐허’는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긴 시간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쌓아 올렸다. 한때 창문이었던 사각과 반타원형의 프레임들은 유리와 창틀이 있던 자리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담음으로써 건물 벽면 전체에 총천연색 도형을 가득 수놓고 있다.

사진가 서동엽이 찍은 강원도 철원의 노동당사 풍경이다. 폐허라고 해서 거칠고 황폐한 것들만 잔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사진은 보여 준다.

생애의 대부분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리과학과 교수로 살아온 서동엽은 또한 20년 가까이 재야 사진가로서 혼자 사진을 찍어 왔다.

사진가이면서 수학자인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언제나 폐허와 사물들의 이상한 좌표였다. 부서지고 무너진 것들이 모여 있는 낡고 허름한 공간을 찾아다녔고, 중형카메라의 수열을 작동시켜서 정사각의 프레임 안에 그 풍경들을 안착시켰다. 시간이 지나자 낱낱의 사진들이 쌓여서 사진 시리즈 ‘Integration of time·시간의 축적’을 이루었다(Integration은 ‘적분’을 뜻하는 수학용어이기도 하다).

“나는 수학자다. 평생 일반인들과 터놓고 교류하기 힘든 다소 동떨어진 세상을 연구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작가는, 그래서인지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보다는 세월의 때가 묻은 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피사체에 눈길이 갔다고 토로한다.

사진적 감성을 자극하는 피사체를 발견하면 마치 엉클어지고 꼬여 버린 연구의 실타래를 풀어 줄 한줄기 실마리를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누군가 왜 하필 낡고 누추한 곳을 찾아가느냐고 물으면, 그곳에서는 삶의 희로애락이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고 증발된 후에 남겨진 차분하고 나직한 외침이 들려오기 때문이라고,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찾아낼 수 있는 피사체가 꽁꽁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찾기 어렵고 찾고 나면 그만큼 기쁘다는 점은 수학과도 닮았다.

‘낡고 누추한 곳’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한 지점을 구성하는 ‘새롭고 조형적인 풍경’으로 재탄생하는 신비가 서동엽의 사진 시리즈 속에 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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