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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달과 6펜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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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31면

배현정 경제산업부문 기자

배현정 경제산업부문 기자

‘달과 6펜스’.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증권거래업자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가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을 버리고 돌연 파리로 떠난다. 동네에선 그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나서 떠났다는 소문이 떠돈다. 그러나 무성한 소문과 달리 그가 가족들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그림 때문이었다.

작품에서 제목인 ‘달’이나 ‘6펜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너무 멀어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달’은 갈망하는 아름다운 이상을, 영국의 가장 낮은 단위의 화폐인 ‘6펜스’는 척박하고 세속적인 현실을 상징할 뿐이다.

이 소설 주인공의 모델은 위대한 화가 폴 고갱이었다. 실제 고갱은 젊은 시절,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하며 5명의 아이를 낳고 살아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고 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 그림에 매달린 삶은 35세부터였다.

위대한 화가로 제2의 삶을 살았던 폴 고갱의 작품 ‘피티 테이나’. [사진 루브르박물관]

위대한 화가로 제2의 삶을 살았던 폴 고갱의 작품 ‘피티 테이나’. [사진 루브르박물관]

최근 은퇴한 은퇴전문가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퇴직자들에게 ‘제2의 일’을 거듭 강조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이 주된 직장에서 퇴직하는 평균 연령은 49.3세다. 하지만 실질 은퇴시기는 72.3세다. 퇴직 후에도 20년이 넘게 일하는 긴 시간, ‘달’처럼 동경하는 일을 찾는 것이 후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 남다른 노후 비법을 기대했던 때문일까. “60~70대에도 일을 지속하라”는 그의 현실적 조언에 공감을 표한 이들이 많았지만, “끔찍하다” “차라리 죽으라고 해라”처럼 격앙된 반응도 나왔다.

우리나라는 노동 시간이 길고, 노동 강도가 매우 강하기로 유명하다. 6펜스의 삶에서 과도하게 자신을 불태우며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빠르게 자산을 불린 뒤 조기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에 대한 로망이 남다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파이어족마저 최근 일터로 속속 복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자산 폭락과 고물가의 공습 탓이다. 길어진 수명도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OECD 보건통계 2022’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3.5년이다. OECD 국가 평균(80.5년)보다도 3년 더 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은 우리의 예측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는 연구도 나온다.

노화 연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스티븐 오스태드 아이다호대 교수와 스튜어트 올샨스키 일리노이대 교수는 2000년 인간 수명을 주제로 한 무려 ‘5억 달러’의 내기를 벌여 화제가 됐다. 2000년 출생자 중 2150년까지 생존한 사람이 나오는가가 전제였다. 상금은 2150년 150세에 이른 사람의 유무를 따져 두 학자의 후손이 수령할 예정이다. 오스태드 교수는 150세까지 생존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데 베팅했고, 올샨스키 교수가 예측한 인간의 최대 수명은 130세다. 노후소득을 어느 정도 준비했다 하더라도 예상외로 오래 살게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경록 고문은 “건강과 일자리의 2가지 조건을 갖췄다면, 은퇴의 7~8할은 준비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달’을 동경했던 고갱처럼, 인생을 풍요롭게 할 일을 찾을 것인가, 충분한 돈을 모아 퇴직을 즐길 것인가. 은퇴로 가는 길목에서 답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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