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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주현 특별기고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방아쇠 당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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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일촉즉발 전운 감도는 우크라이나

서방과 러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북쪽인 벨라루스의 흐로드노에서 지난 12일 벨라루스 육군 기계화 여단과 러시아 공수군 공중강습 여단이 ‘동맹결의 2022’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서방과 러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북쪽인 벨라루스의 흐로드노에서 지난 12일 벨라루스 육군 기계화 여단과 러시아 공수군 공중강습 여단이 ‘동맹결의 2022’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월 16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일 유럽 정상들과의 화상회의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주가지수가 크게 출렁거렸고, 유가는 90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지난해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국제 안보와 세계 경제는 하루 앞을 예측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3년째를 맞은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고통받고 있는 지구촌은 언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지, 지금 같이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원인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사태가 전개될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응 방안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대비할 때다.

바이든 “러시아, 16일 침공 가능성” 언급하면서 국제정세 출렁
러시아군 13만명 우크라이나 국경서 군사훈련하며 무력 과시
미국과 나토의 동진 정책이 러시아의 안보 위기 자극해 대립
무력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당분간 위기 상황 지속할 가능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은 지금 일촉즉발 양상이다. 러시아군 병력 13만여명이 우크라이나 국경 부근에서 포위하듯 배치된 것은 맞다. 러시아는 옛 소련 구성국 중 가장 가까운 벨라루스군과 합동훈련을 하면서 언제든 실전에 돌입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에 최신 군사 장비를 지원할 뿐 우크라이나에 파병하지는 않았다. 영국·캐나다·독일·미국이 발틱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폴란드에 각각 1000여명 남짓의 병력을 파견한 정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혹독한 제재를 가하고 러시아를 고립시키겠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토의 동진정책 멈춰세우는 데 방점

우크라이나 정부는 미국 측이 지나치게 전쟁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국민은 수도 키예프의 유로마이단 광장에 다시 몰려나와 항전 의사를 과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형제국인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도 보인다.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러시아가 곧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러시아도 NATO도 우크라이나도 진정한 의미에서 열전에 돌입할 자세가 돼 있지 않다고 본다. 러시아와 NATO의 전쟁은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핵전쟁을 촉발할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러시아의 핵심 의도는 NATO의 동진(東進) 정책을 우크라이나에서 멈춰 세우려는 데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전쟁까지 거론되는 지금의 극한 대결 구도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러시아는 199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미국 측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했던 약속의 마지막 단계라도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일이 통일되면 독일의 동쪽 지역으로는 NATO를 확장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간 미국은 NATO와 유럽연합(EU)을 단계적으로 확장했다. 소련은 냉전 종식과 함께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를 해체하고 위성국가였던 동유럽에서 철군했다.

그러나 NATO는 급속히 확장 정책을 펼쳤고, 소련의 구성국이었던 발틱3국도 2004년 NATO에 가입했다. 2009년 NATO는 급기야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까지 나토에 가입시키자고 결의했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갈망한 옛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EU와 NATO에 경쟁적으로 가입해왔다. EU나 NATO는 자격 조건을 갖춘 동유럽 국가들을 지속해서 가입시켜왔다. 이로 인해 러시아 입장에서는 안보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까지 NATO에 가입하고 코앞에 NATO군이 배치되는 상황을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 배경에는 러시아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다. 중세 국가 키예프루스(Kievan Rus)부터 시작해 로마노프 왕조와 공산혁명을 거쳐 탄생한 소련 초기까지 러시아는 칭기즈칸의 몽골, 오스만 튀르크, 프랑스,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웨덴 등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끈길기게 생존해온 국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아돌프 히틀러의 침략을 당하면서 무려 2500만명이 사망했다.

독일군은 1941년 6월 독·소 전쟁을 일으켜 북부·중부·남부 3개 방향으로 러시아 제국을 공격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하루 100㎞씩 진군하는 전격전으로 소련을 신속하게 유린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900일간 봉쇄했고 그 여파로 러시아인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 7개월간 계속된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공방전 와중에 200만명이 희생됐다.

2개월 안에 러시아 제국을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심 찬 전쟁 계획의 중심에 우크라이나가 있었다. 러시아 주변의 지형도를 보면 우랄산맥부터 서쪽으로 헝가리까지 산다운 산이 없고 지평선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필자가 주러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던 시절 러시아 외교관이 “러시아의 최고 애국자는 누구일까”라는 농담을 건네곤 했다. 정답은 ‘수로바야 지마(혹독한 겨울)’였다. 실제로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도, 1941년의 히틀러도 러시아의 혹한에 패해 물러간 사례가 있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국민의 머릿속에는 독·소 전쟁의 아픈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문제를 최고의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 크림반도 합병으로 9년째 경제제재

러시아는 소련이 아니다. 공산 정권 시정의 계획경제를 대신해 지금은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렸다. 러시아 젊은이들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실용적으로 사고하고, 정상적인 무역과 투자 활동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정치인들이 아직도 이상한 나라로 취급하니 러시아인들의 불만이 크다. 중국의 고속 성장 그늘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후진국 취급을 받으니 러시아인들은 자존심 상해한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과 동우크라이나 분쟁을 계기로 미국과 EU는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러시아는 수입대체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힘들게 견뎌온 지 벌써 9년째다. 미국이나 EU와 빨리 타협해 경제제재를 해제해야 할 것 아니냐는 필자의 질문에 러시아 외교관은 “그들은 냉전 종식 이후에도 사사건건 러시아의 행동을 통제하고 고립시키려 해왔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트집을 잡을 거다”라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소련 붕괴 직전 유럽의 정치전문가들이 유럽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러시아를 포함한 ‘더 큰 유럽(Greater Europe)’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전개돼왔다. 냉전이 종식되자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해체됐지만, NATO는 ‘가상 적’의 하나로 러시아를 상정하는 정책이 추진됐다.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은 앞으로 신냉전 구도에서 계속 대립할까.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은 1968년부터 파이프라인에 투자했다. 유럽 국가들은 현재 10여개의 다양한 루트를 통해 러시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익을 보고 있다.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의 타협과 협력이 가능하고 지속해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러시아는 EU의 3대 수입국이다.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유럽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유럽의 안정을 위한 외교 노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정당한 싸움보다 평화가 더 값져”

앞으로 수개월은 미국과 NATO 회원국 및 우크라이나 사이에 활발한 대화와 외교 행보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4월에 대선을 앞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신임 독일 총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중재에 나섰다. 쓰라린 전쟁을 많이 겪은 러시아인들은 “어떤 정당한 싸움보다 평화가 더 값지다”고 말하곤 한다. 북극항로 시대의 개막을 준비해온 러시아가 유럽에서 또다시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위기 상황은 한반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국방력도 중요하지만, 국민통합을 이루는 정치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조지아·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벨라루스 등 옛 소련 구성국들은 전환기 경제의 취약성에다 부패하고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정치 리더십 위기로 ‘색깔 혁명’을 겪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막강한 국방력도 역동적인 경제력도 필요하지만, 국민이 정부와 함께 국가를 지키겠다는 단합력을 보이는 것이 관건이다.

백주현 유라시아21 부이사장, 전 주카자흐스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