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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다 귀하면 나라 망해” … ‘양반들 리그’ 옹호한 정약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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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27면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③ 시대 역행한 신분해방 반대론 

공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고 했다. 실학자들은 인간의 귀천을 구분했다. 공자 유학의 본령에 위배되고 근대 지향적 사고도 아니다. 사진은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대중을 비하하는 대사가 나온다. [중앙포토]

공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고 했다. 실학자들은 인간의 귀천을 구분했다. 공자 유학의 본령에 위배되고 근대 지향적 사고도 아니다. 사진은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대중을 비하하는 대사가 나온다. [중앙포토]

민중을 개·돼지에 비유하는 망언으로 파면됐던 교육부의 한 고위 공무원이 최근 ‘파면 불복 소송’에서 이겨 복직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2016년 7월 언론인들과 저녁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발언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문제의 발언은 당시 700만 관객이 본 영화 ‘내부자들’의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와 현실을 혼동한 가운데 나온 ‘신분제 공고화’가 오늘 우리가 실학과 함께 생각해볼 주제다.

유형원 “귀천 차별은 천지의 이치” #이익 “백성, 악인이 많고 선인 적다” #양반·상놈 계급 사회 공고화 주장 #청나라의 노비해방 알면서도 외면 #‘백성이 근본’ 유학 본령에도 배치 #근대적 평등 선구자로 보기 어려워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였다. 국가체제가 양반 중심으로 이뤄졌다. 조선 초기만 해도 문반과 무반 두 부류 관리를 지칭하던 양반이란 용어는 점차 지배층을 상징하는 말로 바뀌어갔다. 맨 위에는 양반층, 맨 아래는 노비층이 자리했다. 양반과 노비 사이에는 중인(하급 관료나 기술자)과 상민(농민·상공인)이 존재했다. 양반과 다른 세 계층의 신분 차별이 『경국대전』(1460년)에 법적으로 명문화되었고, 노비는 호적이나 재산목록에도 등록되었다. (김건태, ‘18세기 중엽 사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

영·정조 임금보다 더 시대에 뒤떨어져

18세기 실학자들은 신분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근대 지향’의 실학이라면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어야 할 텐데, 실학자들의 발언에서 인간의 차별 없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선구적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분제 유지를 원칙으로 고수하면서 신분해방의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은 신분의 귀하고 천한 차별이 불변의 이치이자 추세라고까지 말한다. “천지에 자연히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어, 귀한 자는 남을 부리고, 천한 자는 남에 의해 부림을 당한다. 이것은 불변의 이치이고 역시 불변의 추세이기도 하다.” (『반계수록』 ‘奴隸’)

인간을 귀한 자와 천한 자로 나누어 보는 유형원의 인식은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者)”(『예기』)는 공자 유학의 본령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공자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백성은… 하대(下待)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民惟邦本)….”(『서경』) 동양 민본사상이 이 “민유방본”에서 나왔다. 이를 맹자는 “민귀군경(民貴君輕)”론으로 계승했다. “백성은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 (『맹자』 ‘盡心下’)

백성을 천하고 어리석게 보는 시각은 공맹을 따르는 유학자의 말이라고 보기 어려울뿐더러 근대 지향적이지도 않다. 유형원의 신분제 옹호는 ‘학교론’에도 적용된다. 그는 사대부의 모든 자제는 입학을 허용했지만, 서민의 자제는 준재(“凡民俊秀者”)의 입학만 허용하고, 일반 서민 이하의 자제는 배제했다.(『반계수록』 ‘貢擧事目’) 또 유형원은 임금노동자(雇工)가 확산되는 때를 기다려 노비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이미 노비제 폐지가 시대의 흐름으로 요청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양반지주층을 안심시키며 노비제를 정당화하는 논변이었다.(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157~163쪽)

‘실학의 중시조’ 성호 이익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유형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천하에 선자(善者)는 적고, 불선자(不善者)는 많다”(『곽우록』), “대개 백성에는 악인이 많고 선인이 적다”(『성호잡저』)는 발언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공맹의 성선설, 민본사상과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익은 이런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여 유형원이 그랬던 것처럼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공맹보다는 관중이나 순자와 법가의 성악설에 기반을 둔 논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65~73쪽)

노비제 해체 늦추려 점진적 폐지 주장

18세기 농촌 풍속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타작도’. 벼를 타작하는 농민 혹은 노비와 이를 누워서 바라보는 양반이 보인다. [중앙포토]

18세기 농촌 풍속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타작도’. 벼를 타작하는 농민 혹은 노비와 이를 누워서 바라보는 양반이 보인다. [중앙포토]

실학에 대한 기존의 통설은 실학자들이 신분 차별을 유지하고 옹호했던 발언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유형원의 점진적 노비제 폐지와 이익이 노비세습을 나쁘다고 한 것만을 과장해서 높이 평가했다. 그들이 마치 당시로선 최선의 근대 지향의 제안을 한 것처럼 서술해놓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분차별의 해소를 실질적으로 추진한 영조와 정조 임금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신분제 폐지의 흐름을 그들이 알면서도 은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신분 차별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했다. 북송(960-1126) 시대 초기부터 과거 시험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한 획기적 조치였다. 중국의 앞선 문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요즘의 시진핑 정권이 보여주는 시대착오적 독재 행태와 착각해서는 안 된다. 15세기 명나라 때는 지배계층인 ‘신사(紳士)’의 각종 특권도 제한했다. 과거 급제자 본인 1세대에 한해서만 면세특권 등을 허용했고 세습을 금지했다. 신분 차별적인 주자학을 비판하며 왕수인(1472~1528)이 양명학을 주창한 것도 이 무렵이다. “길거리에 가득한 백성들이 모두 성인(聖人)이다”(『전습록』)는 양명학의 요지는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면서 공맹 유학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환기시켰다. (오금성, 『국법과 사회관행』 『모순의 공존』)

명나라 때는 또 과거에 합격한 신사만 노비를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고 해도 법적으로 노비를 소유할 수 없었다. 부자들은 양자와 양녀를 들여 노비처럼 부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일종의 계약제로 언제든 신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분세습을 전제로 한 노비와는 달랐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제를 거치며 당시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이 완화되었고 1750년대 들어서는 법적으로 노비 소유가 금지되었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94쪽)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이 일찍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북경을 다녀온 후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東還封事’·1574)에서 명나라의 신분제 실상을 알렸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유형원은 『반계수록』(1670년)에 조헌의 ‘동환봉사’를 세 번이나 인용했다.(‘勿限門地’, ‘奴隸’) 유형원 스스로 “중국에는 노비가 없고 모든 용역에 임금노동자(雇工)가 쓰인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익도 이미 중국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단언한 것으로 보인다. “노비가 세습되는 것은 또한 고금에 사해를 통틀어 있어본 적이 없다”(『성호사설』). 이들이 중국의 노비제 폐지 사실을 몰랐다면 시세의 흐름에 무척 어두웠다고 할 수 있겠고,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의 노비제 폐지에는 눈을 감았다면 이들은 ‘시대의 선각자’가 아니라 시대의 진실 은폐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65~73쪽)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어떨까. 정약용은 1731년(영조7) 노비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신해년(1731)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망하는 것(亂亡)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목민심서』 ‘辨等’)

18세기 실학, 체제 개혁보다 수호 지향

백성을 어리석고 천하게 보는 시각은 유형원·이익에 이어 정약용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실학자들이 흔히 주자학을 비판하며 공자의 본래 사상으로 돌아갔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의 발언을 통해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약용의 “나는 나라의 모든 백성이 통틀어 양반이 될까 걱정한다… 다 귀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하다”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유당전서』, ‘跋顧亭林生員論’). 이미 해체 중이던 신분제에 대한 정약용의 시각은 개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2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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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한민국이 조선시대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신분제 폐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 사농공상의 신분 차별이 없다. 현실적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이 벌어지고, 금수저의 ‘갑질’이 횡행한다 하더라도 법 앞에서는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그 어떤 특권이 없이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부 공무원의 ‘신분제 재도입’ 망언은 이례적으로 돌출해 보인다. 혹시 그는 18세기 실학자의 저서나 실학자들을 신분해방론자로 엉뚱하게 영웅시해놓은 20세기의 역사책들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닐까.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참고자료
-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청계, 2018.
-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오금성, 『국법과 사회관행』, 지식산업사, 2007.
- 한영우,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지식산업사, 2007.
- 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4.
-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1990.
- 김건태, ‘18세기 중엽 사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 『대동문화연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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