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로 꼽히는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황을 미국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고 16일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문서에는 한경직 목사가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에게 신의주 지역에서 소련군이 벌이는 공산주의 정치활동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 적혔다. 베닝호프는 이를 미 국무부로 보내며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에는 당시 신의주 제1 교회에 시무했던 한경직 · 윤하영(1889~1956) 목사가 겪었던 상황이 기록됐다. 내용에 따르면 일본 패망 이후 신의주로 진군한 소련군은 당시 이북 지역의 정부기관·언론사·공장·농지 등의 소유권을 공산당에 넘기며 통제력을 높여나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신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이 조직됐으나 공산당은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경직 목사는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고 증언했다.

또 비밀청원서에는“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그는 “상상을 넘어선다”며 소련군의 만행을 자세히 기술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했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냈다. 박 교수는 “이 비밀청원서는 평안북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소련군 진주 후 한 달간 직접 목격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미군정이 소련군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한편, 한경직 목사는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식민 통치 말기에 사임하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며 긍휼사역에 힘썼다. 이후 광복을 맞이하면서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미군정에 비밀청원서를 제출하고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공산당의 탄압에 못 이겨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탈북했다.

1902년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한 목사는 평양 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33년부터 신의주 제2장로교회 목사를 맡았다. 해방 직후 월남, 45년 영락교회를 세우고 72년까지 담임목사를 지냈다.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이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렸고, 수많은 사회복지시설과 교육기관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