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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대 장인 3명 “50여 년 하루도 쉰 적 없어, 설날도 빵 만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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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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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서울 장충동 태극당 매장에 모인 제빵사와 직원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신경철 전무, 한청수(아이스크림 담당)씨, 신혜종 대리, 김영일(전병)·이성길(제빵)씨, 신혜명 실장. 신 전무의 첫째 누나가 혜명, 둘째 누나가 혜종씨다. [사진 오상민 기자]

“빨리 일어나라우!”

태극당의 70년 역사 산 증인들

매일 오전 4시면 어김없이 사장님의 호통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리며 적막을 깼다. “날래 가지 않고 뭐하나.” 이불 속에서 조금 꼼지락거릴라 치면 금세 불호령이 떨어졌다.

창밖을 보니 새벽 어스름의 세상은 아직 고요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일어나자마자 명동의 삼양탕으로 향하는 뒤통수에 마지막 소리가 꽂힌다. “깨끗이 씻고 오라우.”

지난 3일 서울 중구 장충동의 빵집 ‘태극당’ 작업실에서 만난 한청수(75·66년 입사)씨의 기억이다. 한씨는 입사 후 결혼할 때까지 3년간 건물 4층의 사내 숙소에서 지내던 신참 시절을 이같이 떠올렸다.

한씨는 “요즘도 아침에 눈을 뜨면 ‘빨리 일어나라’는 사장님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한씨는 김영일 (65·68년 입사), 이성길(66·75년 입사)씨와 함께 태극당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한씨는 아이스크림, 김씨는 전병, 이씨는 제빵을 담당한다. 입사 이래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3대째 태극당을 경영 중인 신경철(31) 전무이사는 “세 분은 태극당의 제빵 ‘장인’이며 태극당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서울 최고(最古) 제과점인 태극당이 문을 연 지 올해로 딱 70년이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 신창근 창업주(2013년 작고)가 해방 후 1946년 서울 명동에 제과점을 열고 ‘태극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렵게 찾은 나라를 오래오래 지키자”는 의미에서 로고는 무궁화로 삼고, 직원들의 유니폼에는 작은 태극기를 달게 했다. 이 규칙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창업 후 뉴욕제과·독일제과 등 외국 지명을 딴 상호들이 유행했으나 상호 변경은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신 사장을 “괄괄하고 대쪽 같은 영감님”으로 기억했다. 특히 “제 몸이 깨끗하지 않은데 어떻게 시민들이 먹을 빵을 만드느냐”며 아침엔 물론 일을 마치고도 직원들을 목욕탕으로 보냈다고 한다.

한씨는 “목욕탕과 계약을 맺었다. 카운터에 ‘태극당이요’ 말하고 그냥 들어가면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에 매일 목욕탕에 가는 호사를 누린 건 대한민국에서 우리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개업 후 양갱·단팥빵 등을 주로 팔던 태극당은 47년 얇은 과자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내놓았다. 이게 인기를 끌면서 서울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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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장충동 이전 직후 태극당 전경. 신창근 창업주는 정문 위에 ‘菓子中의 菓子(과자중의 과자)’라고 써 붙여 자부심을 표현했다. [사진 태극당]

한씨는 67년부터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50년째 만들고 있다. 입사 당시에는 본점과 지점을 오가며 자전거로 빵 배달을 했는데 선임자가 그만두면서 엉겁결에 물려받았다.

장안의 명물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이어간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씨는 말했다. “비결은 우유였어. 태극당이 운영하는 태극농축원(경기도 남양주)에서 젖소 430마리가 짜낸 우유를 매일 아침 공급받았지. 그렇게 신선한 우유를 재료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니 맛이 없는 게 이상하지. 대한민국에서 우리밖에 못하는 특급 비방이었지.”

48년째 전병을 만들고 있는 김씨는 “요즘 가스 불을 이용해 전병을 구울 때면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70년대만 해도 가스가 없어 오전 4시에 일어나 연탄불부터 피웠다”고 말했다.

70년대는 태극당의 황금기였다. 기억을 더듬는 세 장인의 눈이 반짝였다. 부산·울산 지역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이씨도 이때 스카우트됐다. “당시 내 월급이 8000원이었는데 태극당이 5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담배 1갑에 10원 할 때였는데 파격적인 액수였다. ‘역시 사람은 서울 물을 먹어야 크는구나’ 싶더라.”

한씨는 “회장님은 한 장의 휴지를 두세 차례 사용할 정도로 검소했다. 경영 면에선 달랐다. 당시 서울에서 태극당·뉴욕제과·고려당을 알아줬는데 자동 빵반죽 시스템과 자동계산대를 가진 건 우리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태극당 매장 중앙 기둥에는 ‘납세는 국력. 영수증을 꼭 받아 가세요’라고 적힌 액자가 50년째 걸려 있다.

김씨는 “사장님이 일일이 영수증을 챙겨 가라고 권해 당시 손님들이 어색하게 여겼다. 그런데 ‘삐빅’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나오는 게 재밌으니까 그걸 보려고 빵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69년 태극당 납세액은 635만5000원으로 전국 제과점 중 1위, 본지 70년 3월 3일자 3면).

당시 태극당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김씨는 “365일 하루도 쉬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케이크가 8000개가 나갔는데 전날 밤에는 수량을 맞추느라 직원들이 새벽 3시까지 일했다”고 회상했다. 입시철도 마찬가지. “수험생 찹쌀떡을 사려고 전날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이씨는 “설날은 ‘특별히’ 오후 5시에 마감했다”며 “그런데 케이크랑 전병 세트 등이 오후 2시면 다 팔렸다. 사람들이 항의하니까 양해를 구해 잠시 문을 닫은 뒤 다시 만들고 나면 문을 열어 팔곤 했다”고 말했다.

유명 인사 단골도 많았다. 한씨는 “문희씨는 여기 케이크를 자주 사갔다. 이대근씨는 ‘나는 세상에서 버터빵이 제일 맛있다’며 거의 매일 찾았고, 김자옥씨는 사람들 틈에 줄을 서서 도너츠를 사 갖고 갔다. 양희은씨는 속이 꽉 찬 사라다빵을 절반씩 잘라 먹곤 했다”고 소개했다.

이들의 기억엔 박정희 대통령도 등장한다. “하루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대통령 생신에 쓸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며 찾아왔어요. 만드는 내내 경호원이 계속 지켜보더군요. 행여나 나쁜 게 들어갈까 봐 그런 거죠. 밀가루 반죽에 머리카락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나 어찌나 떨리던지….”(이씨)

기업과 공공기관 고객도 많았다. 이씨가 “71년 남북 적십자회담이 처음 열리니까 ‘북한에 가져간다’며 적십자사에서 센베과자 52통을 사갔다”고 말하자 김씨는 “포항제철 준공식을 할 때는 트럭 세 대가 와서 빵을 싣고 갔다”고 맞장구쳤다.

한씨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통일교 합동결혼식이었다. 피로연에 쓴다고 카스텔라 1만 개를 사갔다”고 했다.

하지만 태극당은 80년대부터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에 자리를 조금씩 내주다가 90년대 중반부터는 대형 프랜차이즈 등에 밀리며 급격히 위축됐다.

한때 서울 전역에 퍼져 있던 7개의 지점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현재는 장충동 본점만 남았다. 제빵사만 86명을 두는 등 200여 명에 달했던 직원은 30여 명까지 줄었다.

태극당은 최근 변신을 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장충동 건물을 42년 만에 새 단장했다. 2대 신광열 사장의 아들인 신경철(2013년부터 경영) 전무가 지휘했다. 매장 안에 카페를 두는 등 젊은 감각을 끌어들였다.

신 전무는 "‘菓子中의 菓子(과자중의 과자)’라는 모토처럼 태극당을 다시 활기차게 만드는 게 저의 과제다. 할아버지가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늘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글=유성운 기자, 김준승 인턴기자(동국대 4) pirate@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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