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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박·짤박·완박 … 대통령만 바라볼 뿐 동지의식 약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친박은 무슨, ‘완박’이죠. 완장 찬 친박.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어 유승민 찍은 거예요.”(새누리당 모 의원)

새누리당 내 최대 계파인 친박(親朴)의 위기다. 지난 2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박계 이주영 의원은 비박(非朴)계 유승민 의원에게 완패했다. 지난해 국회의장(정의화-황우여), 당대표(김무성-서청원) 선거에 이은 친박의 3연패다. 여태 여당의 권력 핵심층이 집권 초·중반기에 이런 푸대접을 받은 적은 없다. “이러다 내년 총선에 ‘친박’ 이름표 달면 당선되겠나. 아니 공천이라도 받겠나”란 하소연마저 터져 나오고 있다. 20%대로 떨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과 맞물리면서 자칫 친박의 와해까지 점쳐지고 있다.

원내대표 선거는 멀박의 반격

‘친박’이란 용어가 처음 나온 건 2004년이다. 당시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서면서다. 진영-유승민 비서실장, 김무성 사무총장 등 박근혜 대표가 임명한 당직자를 중심으로 서서히 박근혜계가 용틀임한다. 본격화는 2007년이다. 이명박 후보와의 당내 경선이 격렬해지자 확실한 계파로 자리 잡게 된다.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던 이혜훈 전 의원은 “당시 대세는 이명박 후보였다. 구름처럼 사람이 몰려들었다. 반면 친박은 소수 정예였다. 당내에선 비주류였지만 우리끼린 쉽사리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적 의리를 중시한다는 자긍심이 컸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명박 후보야 인기만 높지 정치 경력 짧고 새누리당 뿌리도 약한 용병 그룹 아닌가. 반면 박근혜 후보는 TK 주류를 잇고 있다는 태생적 자부심이 강했다”고 말한다. 당시 언론에선 김무성·유승민·허태열·최경환·서병수·유정복·김재원·이혜훈을 가리켜 ‘친박 8인방’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른바 원조 친박, ‘원박(元朴)’의 탄생이었다.

박근혜 의원이 2007년 경선에서 지고 사실상 정치적 은둔 생활을 하면서 친박은 서서히 분화된다. 대표적 계기가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때다. 김무성 의원은 박근혜 대표와 뜻을 달리하며 수정안을 찬성한다. 이미 2009년 김무성 의원이 원내대표에 나서려고 할 때부터 둘 사이는 벌어져 있었다. 친박 내 권력이 이동하는 결정적 시기로는 박근혜 비대위가 출범할 때인 2012년 무렵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친박계 의원은 “친이계가 여전히 강했던 2011년 유일한 친박 최고위원은 유승민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꾸려지자 공천을 좌지우지한 이들은 최경환·유정복·서병수·권영세 등 4인방이었다. 사실상 친박 서열 1위인 유승민이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유승민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친박인 ‘신박(新朴)’이 전면에 등장했다”고 전했다.

현재 새누리당 내 지형은 크게 친박계와 비박계으로 나뉜다. 이 중 비박계의 핵심 세력은 원조 친박이었다가 이제는 멀어진, 이른바 ‘멀박’이다. 김무성 당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의 K-Y라인이 대표적이다. 멀박이 당내 친이계·중립성향·소장파들을 규합해 친박에 일격을 가했다는 게 지난 원내대표 선거에 대한 대체적 분석이다.

반면 친박계는 크게 두 부류다. 2007년 경선 때부터 일관되게 정치인 박근혜를 돕고 보좌하고 있는 ‘구박(舊朴)’과 2010년 이후 새롭게 진입한 ‘신박’으로 나뉜다. 특히 이 가운데 대통령 집권 이후 당직이나 내각에 합류한 구박계 ‘왕당파’와 신박 일부 세력이 합쳐져 ‘친박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멀박 쪽에선 친박 주류를 향해 ‘종박(從朴·무조건 추종하는 친박)’이라고 폄하하는 반면, 친박 주류는 멀박을 향해 ‘짤박’(짤린 친박)이라고 무시한다.

이 밖에 2012년 비대위 체제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다 이제는 오히려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김종인·이상돈씨를 ‘탈박(脫朴)’, 친이 쪽에 속해 있다 친박으로 옮긴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을 ‘월박(越朴)’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래픽 참조>

“용비어천가만 듣지 말고 비주류 포용해야”
친박을 칭하는 용어는 이외에도 숱하다. 대표적인 게 ‘복박(復朴)’. 친박에 있다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다. 한때 김무성 당 대표를 일컫는 말이었다. ‘노박’(원로 친박), ‘용박’(대통령을 이용하는 친박) 등도 있다.

왜 이럴까. 『친박 1095일』을 쓴 윤승모 작가는 “박근혜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친박을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여태 친박과 관련된 모든 용어와 분류는 결국 정치인 박근혜와 얼마나 가깝고, 멀고, 틀어지고, 다시 좋아졌느냐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돼 왔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상도동계·동교동계·친노 등 한국 정치를 상징해 온 계파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뚜렷한 정치 지향성이며 다른 하나는 오랜 기간 동거동락을 하며 끈끈하다는 동질성이다. 친박엔 그 두 가지가 없거나 아주 약하다”고 말했다.

수직적 관계만 강할 뿐 수평적 연대의식이 희박하다는 점도 친박의 특징이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끼린 ‘친박이 무슨 계파냐, 이익집단이지’라고 한다. 박근혜 치마폭에서 필요에 따라 왔다 갔다 할 뿐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소장파 의원은 “이주영 후보가 자신이 당선 안 되면 당·청이 콩가루 된다고 했지만 사실 친박 자체가 콩가루”라고 일갈했다.

중간 보스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친박연대’ 조직까지 만들었던 서청원 의원이 그런 역할을 하려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여권 인사는 “대통령 스스로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며 “그걸 중시했다면 당내 선거를 저렇게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윤승모 작가 역시 “박 대통령은 자기 계파를 무작정 챙기지 않고 정치와 일정 거리를 뒀다. 그건 과거 계파 보스와 다른, 평가할 만한 대목”이라고 했다.

친박의 값어치가 급락하면서 일각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탈박’을 선언하는 이들이 공공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임동욱 한국교통대 교수는 “뚜렷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보호막을 거두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친박이 소수파로 전락하면서 더 공고해질 것이란 분석도 있다. 김형준 교수는 “대통령이 차기 정무특보단에 친박 주류를 또다시 중용한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전했다.

멀박으로 분류되는 이혜훈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음은 닫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누구보다 원한다. 실패한다면 한때 온몸 바쳐 던진 내 과거 역시 실패하는 거 아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이들만 곁에 두지 않고 박 대통령이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까지 포용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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