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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노비 집안 어떻게 양반이 됐나 … 호적대장 200년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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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
204쪽, 1만2800원

18세기 초 경상도 단성현에 49세 평민 김흥발이 살았다. 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역이다. 그의 일은 통수(統首), 즉 마을의 잡다한 행정업무를 책임진 통장쯤 됐다. 1717년 호적대장에 따르면 가족 관계에도 특이점이 없었다. 평민 집안 출신의 아내를 뒀다. 17세 된 아들은 역리 보조 일을 했다. 조선 시대 평민에 부여된 직역(국가가 정한 개인의 의무) 중 하나다.

 그런데 3년 후 이상한 일이 생긴다. 1717년 김흥발은 조부·증조부·외조부의 직역을 기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720년 호적대장에 조부·증조부를 정병(正兵)으로 적었다. 평민의 직역이다. 외조부도 평민에 해당하는 양인(良人)이라 썼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 돌아온 걸까.

 미스터리를 파헤치다 보면 당대의 사회상이 줄줄이 달려 나온다. 저자가 호적대장을 중심으로 김흥발 가문의 200년을 추적하고 내린 결론은 ‘신분 세탁’이다. 김흥발의 아버지 수봉은 성(姓)이 없는 노비였다. 노비는 양반의 충실한 재산이어야 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양반의 상속 재산으로 셈해졌다. 한 가족이 모여 살기도 어려웠다. 양반들이 노비 가족 구성원을 따로 떼어내 각각 소유했기 때문이다. 노비는 또 주인에게 재산상 손해를 주는 결혼을 하면 노동력·금전으로 보상해야 했다.

 현실을 바꿀 방법은 둘. 도망가거나 흉내 내는 것이었다. 김흥발의 아버지는 양반 같이 되기를 시도했다. 호적대장에 나온 그의 직역은 납속통정대부다. 납속이란 국가에 곡식을 낸다는 의미다. 국가재정이 어려울 때 많은 곡식을 내고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받았을 것이다. 재산을 모아 노비 신분을 벗었단 뜻이다. 당시 일부 노비는 토지에 노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1678년 호적대장에 성과 본관을 적고, 김흥발 가문의 삶은 나아졌을까. 이들은 양반들이 벗어 던진 군역의 의무를 떠안았다. 여기에서 또 벗어나야 했다. 김흥발은 재산을 이용해 아들들을 서원 원생으로 집어넣었다. 공부 중이면 군역이 면제됐기 때문이다. 양반과 거리 좁히기는 계속됐다. 벼슬 얻지 못한 양반의 직역인 ‘유학(幼學)’을 호적대장에 거짓으로 썼다. 이렇게 노비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양반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서류를 갖게 된 것이다.

  노비들이 신분의 벽을 깬 망치는 돈과 교육이었다. 저자는 경제력·학력이 대물림 되는 시대엔 개인이 계층을 어떻게 뚫을지 묻고 있다. 이 뼈있는 질문이 평범한 호적대장에서 시작됐단 사실이 놀랍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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